자살과 경쟁: 한국 사회의 불행한 현실

자살과 경쟁: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징후들

 

“조금 가난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부유해졌는데도 불행해요.”

이 말은 중앙대학교 김누리 교수가 어느 강연에서 했던 말이다. 한국 사회는 세계적으로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그만큼의 행복을 얻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우리는 쉽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 자살률 세계 1위, 극단적인 경쟁, 낮은 출생률, 만연한 울분. 이 모든 지표는 우리가 분명히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능력주의를 쫓은 대한민국의 불쌍한 현실

1. 자살은 사건이 아니라 징후다

김 교수는 자살을 개별적인 사건이 아닌, 사회 전체가 보내는 **징후(sign)**라고 해석한다. 자살한 한 명 뒤에는 수없이 많은 자살 예비자들이 있다는 말이다. 단순히 통계 수치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병리의 증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심리적, 구조적 압박의 결과로 해석된다.

 

2. 한국 사회는 왜 이토록 불행한가?

영국 킹스칼리지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갈등이 심한 국가 중 하나다. 미국 작가 마크 맨슨은 한국을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그 이유로 “극단적인 경쟁”과 “절대적으로 잔인한 교육 시스템”을 꼽았다. 실제로 한국 사회는 어려서부터 성적, 입시, 취업, 승진 등 끝없는 경쟁의 터널을 지나야만 살아남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경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경쟁이 너무나도 내면화되었다는 데 있다.

 

3. 자기개발인가, 자기착취인가

현대의 지배 방식은 과거처럼 외부에서 강요하는 폭력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 자신을 억압하고 착취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김 교수는 이를 “자기개발이라는 이름의 자기착취”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 ‘뒤처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피로해진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게으른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결국 스스로를 벌하게 된다. 이 벌의 형태는 종종 자살이라는 비극적 결말로 이어진다.

이러한 자기 착취의 구조는 저항보다는 죄의식을 낳는다. 과거의 착취가 ‘타자에 대한 분노’를 유발했다면, 자기 착취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로 이어진다. 그래서 혁명이 아니라 자살이 일어난다는 것이 김 교수의 통찰이다.

 

4. 공정 이데올로기의 덫

한국 사회는 유독 ‘공정’이라는 가치를 중시한다. 시험, 경쟁, 선발의 과정이 공정하기만 하면 그 결과가 불평등하더라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이 공정이 가장 낮은 수준의 규범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당연히 지켜야 할 기본 룰이지만, 그것이 사회적 가치를 대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실의 ‘공정한 경쟁’은 진공 상태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개인들은 각자의 배경—가정환경, 교육 기회, 건강, 정서적 자원—을 지닌 채로 출발선에 선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공정한 경쟁의 결과이니 승자 독식은 정당하다”라고 말하는 순간, 불평등은 정당화된다.

이러한 공정의 이데올로기는 한국에서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허위의식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실제로 ‘시험’이라는 제도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어버렸고, 그 시험에서 승리한 사람만이 정당성을 갖는 사회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5. 경쟁은 자연스러운가?

경쟁은 불가피하고, 자연스럽고, 필요한 것일까? 김 교수는 이러한 통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300년 전 유럽에서 경쟁은 사회적 범죄였다. 길드 조직 내에서는 경쟁이 협력과 상생을 해치는 중범죄로 간주되었다. 한국 역시 100년 전만 해도 상부상조와 상호부조의 문화가 주류였다.

즉,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경쟁은 사실 자본주의라는 특정한 시스템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일 뿐, 인간 본연의 속성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경쟁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난 새로운 상상력이 가능하지 않을까?

자살과 경쟁: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한국 사회의 징후들

6. 능력주의의 폭력

능력주의는 겉으로 보면 합리적이다. 노력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보상받는 것. 하지만 현실에서 능력주의는 극단적으로 오만한 엘리트와 그들을 보며 울분을 느끼는 대중을 만들어낸다. 마이클 샌델이 능력주의를 ‘폭군’이라고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사회를 양극화시키고, ‘절망사’라는 새로운 사회적 죽음을 낳는다. 미국의 경우 매년 약 15만 명이 자살이나 약물 중독 등 절망에 의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고 있다고 한다.

능력주의는 또한 노동의 존엄을 파괴한다. 일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일에서 ‘성공’할 수 있는가가 중요해진 사회에서는 노동은 더 이상 자존감을 줄 수 없다. 일하는 사람은 ‘능력 없는 자’로, 능력 있는 자는 ‘관리하고 착취하는 자’로 분리된다.

 

7. 진짜 문제는 구조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자살, 울분, 우울감, 낮은 출생률, 교육의 비인간화—all these are symptoms of a broken system. 이 시스템은 능력주의, 경쟁, 공정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강화되고 유지된다.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구조 안에서는 결국 자기 착취의 순환에 갇힐 뿐이다.

 

8. 우리는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김 교수는 말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사회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더 나은 경쟁? 더 공정한 경쟁? 아니면 경쟁 자체가 아닌 협력과 연대의 가능성을 회복할 수 있는 사회인가?

지금 한국 사회가 겪는 위기는 단순한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 구조적 위기다. 이 위기를 직면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공정, 경쟁, 능력주의—을 다시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와 상상력으로 사회를 재구성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

참고 영상

능력주의를 쫓은 대한민국의 불쌍한 현실 | 김누리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 [더 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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